켜켜이(쌓아 올린 소외의 시간)
윤규홍, 오픈스페이스 배 아트디렉터 / 예술사회학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작가 김소라에 대하여 내가 이전에 썼던 글이 작가론에 해당한다면, 이번 글은 새로운 개인전 < 켜.켜.이 >에 관한 논평에 가깝다. 순전히 혼자 계획이었지만, 예정대로라면 나는 이 전시와 함께, 다른 곳에서 벌어졌던 교류전 작품도 언급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곳 사정 때문에 전시를 볼 수 없었고, 나는 대구 도심과 외곽에서 각각 공개된 전시를 김소라 작가가 작업으로 표징하는 공간특성으로 엮어 쓰려던 이 짧은 글의 논지도 바꾸었다. 괜찮다. 그 주제는 다음에 또 쓰면 되니까.
나는 지난 작가론에서 김소라 회화의 핵심 개념을 짚었다. 작가는 이 세계 속에서 작가만의 시선으로 따로 떼어두었다. 그림 안에는 특정한 장소나 대상이 있다. 그렇긴 한데 그것들 대부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하나도 문제 될 일 없을 만큼 널리고 널린 것들이다. 문제는 오직 하나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그 따분한 걸 그림에 옮기면, 그 작업은 따분한 일인가, 아니면 재미있는 일인가? 여기에, 작가가 준비해놓은 재미있는 기제가 있다. 이것은 대상을 중심에 놓고 관찰하는 세계의 편집(cutting)을 풍경화가 아니고, 그렇다고 정물화로 볼 수도 없는 화면으로 배치하고, 자아의 감각에 편드는 채색으로 완성하는 설정이다.
당연하게도,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재해석이 김소라만의 독창성은 아니다. 우리는 재현의 원칙 안에서 모든 회화 사조에서 원본과 다른 이미지를 보아 왔기 때문에, 만약 어떤 비평가가 여기에 관해 조형성을 따진다면 그건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김소라의 작업에 대한 온당한 물음을 “어떻게?” 보다 “왜?”에 맞추고 싶다. 작품이 구현하는 시각 효과에 앞서 창작 동기에 관한 이해이다. 물론 그림에 나타나는 사물의 상태와 색조는 시간이 흐른 흔적을 보여준다. 작가는 빛바랜 그곳에 시선을 두며, 소외된 사물을 인식 영역으로 기어이 끌어 올렸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배려심이다.
우리는 이 전시 제목으로 쓴 부사형 단어 “켜켜이” 다음에 어떤 동사가 올 것인지 알고 있다. “쌓다”이다. 주어 격에 해당하는 쌓는 주체는 나, 너, 그들, 누구도 될 수 있다. 목적어는? 여기서는 이게 재미있다. < 켜.켜.이 >는 두 개의 목적어를 상정한다. 하나는 이번 전시에서 중심을 잡는 연작 “쌓여진 조각”에 등장하는 돌이다. 다른 하나는 시간이다. 작가는 자신의 동네 앞 금호강변을 걷다가 사람들이 쌓아 올린 돌탑을 봤다. 그 소박한 정령 숭배물들은 애당초 산과 들에 흔한 돌이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일시적인 질서를 이룬 체계이다. 그 상태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로 돌아갈 것이다. 작가는 돌멩이라는 낱개들이 거쳐온 시간의 축적 안에서 극적이라 할 수 있는 돌탑의 현현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것을 화폭에 옮기면서 그는 이 이벤트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제삼자가 되었다.
< 켜.켜.이 >는 흥미로운 착안점이 많은 전시다. 하나의 번외 편으로 전시 공간 입구에 세운 “포장된 인사”는 실물 크기쯤 되는 화환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화환이 가지는 인사치레 혹은 키치의 의미가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이 그림은 그 누구도 아닌 작가 본인이 개인전을 축하하는 자기준거(self-reference) 적인 기호로 쓰였다. 전시장 내부엔 “쌓여진 조각들” 연작과 셀프타이틀 “켜켜이”를 포함하여 돌을 소재 삼은 그림들이 전면부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측면부와 후면부에 걸린 그림에는 새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에서 죽은 새를 그린 “뒤덮인 판타지”는 제목에 들어간 환상과는 달리, 한 제련소에 의해 무너진 지역의 비극을 그린 현실 고발이다. 이에 비해 “cut-out”은 환상과 실재가 새를 매개로 결합한 그림이다. 어떤 교파의 예배당 위에 세워진, 평화와 복음 전파의 상징체로 보이는 새 조형물에 진짜 새가 앉은 순간을 작가가 발견했다. “하늘”은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 없는 작품이긴 하나, 작가가 장소 특정적인 건물이나 낌새를 뺀 그림으로 작품 목록을 채운 그림 중에서 가장 선명한 의미를 보여준다. 장소 지시 없이 오직 새가 나는 하늘만 프레이밍 했으니까. “봄과 여름 사이”, “겨울”, “산책”은 작가가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봄부터 겨울까지 벌어지는 사건은 당연히 작가가 이번 해 레지던시 스튜디오에서 보낸 일이다. 그림에서 새들이 앉은 주변 풍경이 표면에 나타나지만, 그 아래에 깔린 내면에는 이곳에서 그가 마주한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
무한에 가까운 흙과 돌, 마찬가지로 영원을 향하는 예술. 이에 반하여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생명체들, 또 레지던시 입주 기간. 김소라 작가는 상반된 시간의 축적을 < 켜.켜.이 > 속에 대비하여 드러냈다. 이렇게 선명한 구도에서, 유한성과 무한성은 서로 스치며 예술의 경지를 맞을 준비를 한다. 이를 실현하는 건 작가의 힘이다. 하지만 이 힘에 지나친 관념의 무게를 얹어 확신하기에 작가는 아직 젊다. 그가 지난 2010년대에 걸쳐 장소를 바꾸어온 공간의 반경 안에서 현재의 예술이 실현되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지대가 작가 앞에 펼쳐지면서, 그를 다그치고 단련시켜 갈 미래가 기다리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